“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한복음9:1-3)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셨습니다. 입바른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쯤에서 질문이 끝났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더 나갔습니다.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렇게 콕 짚어서 말하지 않아도 이런 자녀를 둔 부모는 낳을 때부터 죄인 아닌 죄인이 됩니다. 그 아픔을 삭이기에는 평생도 부족합니다. 아마 그 부모가 곁에 있었다면 자지러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누구의 죄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곧 고쳐주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고통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나타내기 위한 통로입니다! 오늘 이 기적의 주인공을 주목하십시오.
1.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우연이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어떤 기대감도 없이 그냥 그곳에 있었습니다. 구걸하는 거지였습니다(요9:8).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눈여겨보셨습니다. 찾아가셨습니다. 고쳐주셨습니다. 이내 자리를 뜨셨습니다. 세상에! 고침 받은 후에도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몰랐으나 예수님은 이 사람을 잘 아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답입니다!
2. 예수님을 천천히 알아갔습니다
이 사람이 고침 받은 소식이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은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날로 더해가니 말입니다. 안식일을 어겼다 시비 걸던 이들이 이 사람을 두 번씩이나 취조를 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까지 불러다가 으르렁댔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와 아들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에는 진도가 매우 느렸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으로 시작해서(요9:11) 선지자로 알았다가(요9:17) 마침내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순간 급격하게 일어났던 육신의 치유와는 달리 영적 성장(진보)은 매우 느렸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자라기까지 하나님은 충분히 기다리시는 아버지십니다.
3. 예수님을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체험이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변호하다가 쫓겨났습니다. 그때 사라지셨던 예수님께서 홀연히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 사람은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최상의 예를 갖춘 것입니다. 누구에게 엎드려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는 엎드려야 합니다. 절대적인 경의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당연한 태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더 이상 좌우로 치우치지 마십시오. 어둠이 물러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을 붙잡으십시오! 요한복음 9장, 이 사람의 이야기에 걸린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유대인들의 회유와 겁박을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긴 시간의 고통 뿐 아니라 순간의 유혹도 힘든 법입니다. 보십시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아버지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변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적자들에게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요9:30-33). 어느새 그리스도 예수의 전달자로 자랐습니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타고난 장애를 겪다가 고침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길바닥 진흙이 치료제가 된 것처럼 전능하신 그 분의 영향력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은총을 우리 모두에게 부어주시기를 기대하며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