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요한복음 4:16-18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느 여인과 나눈 대화의 한 토막입니다. 장소는 사마리아 수가 동네 우물가입니다. 갈릴리로 향하시던 예수님께서 물을 길러 나온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대화는 곧 반전을 맞습니다. 오히려 여인이 예수님께 생명수를 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하신 요구가 “네 남편을 데려오라.”였습니다. 여인은 즉각 ‘부정’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사실 이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이미 그 여인은 다섯 남자를 거쳤고, 여섯 번째 역시 남편 아닌 사람과 부부의 연을 맺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 여인이 하는 말의 진위를 가리지 않습니다. ‘옳도다.’(right) ‘참되다.’(true) 인정하셨습니다. 위선자라고 공격하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잘잘못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여인에게 수치를 주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수치심을 가려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여인의 거짓이나 부정을 용납한 것도 아닙니다. 거기서부터 여인의 생각을 바꿔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마침내 동네로 뛰어 들어가 예수님을 메시아요 그리스도라고 외치는 뜨거운 전도자로 바꿔놓았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삶을 열어 주셨습니다! 늘 여인의 인생에 깃들어 사라질 줄 모르던 어둔 그늘에 볕이 들었습니다. 여인의 삶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뼈저린 고통과 아픔을 주는 수치스러운 약점이 도리어 우리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약점이 더 이상 약점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역시 각자 삶의 그늘을 지니고 삽니다. 이 어둔 그늘에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비취기를 기대하며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전합니다.
1.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말아라.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훌륭한 점이 많습니다. 첫째, 경제력이 높습니다. 가난하게만 살았던 우리나라가 어느새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잘 사는 나라가 됐습니다. 돈 벌기 위해 서로 오고 싶은 나라가 됐습니다. 둘째, 교육 수준이 높습니다. 지난주 탄자니아에서 우리 교회 인근에 있는 대학으로 유학을 온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공부하고 있는 석박사과정이 최첨단 학문이었습니다. 돌아가면 본국에서는 거의 엘리트 수준이라고 합니다. 지식까지 수출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셋째, 성취동기가 높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습니다. 일을 너무 해서 문제지, 게으름을 태생적으로 싫어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행복도가 매우 낮습니다. 자살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난주만 하더라도 인기 절정을 달리던 한 남성 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수가 동네 우물가 여인도 생을 포기하고 싶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습니까? 사는 것 자체가 지겨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견디고 견뎠더니 그 여인에게도 볕이 드는 날이 왔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맙시다. 반드시 길이 있습니다.
2. 누가 됐든 무엇이든 덮어 주어라.
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전해준 유려한 사랑의 정의(고전13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말세를 사는 성도의 중심 자세인 ‘사랑’에 대해 정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베드로에게 있어 사랑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 정의는 그의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그가 덮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장면을 주목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이미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눅22:61). 예수님의 시선에서 베드로가 느낀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연민의 눈빛이요, 감싸 주시며 격려하시는 눈빛에서 베드로의 통곡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따뜻한 시선과 넓은 마음으로 베드로를 가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가리고 있던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사랑은 가죽 옷으로 가려주신 사랑입니다(창3:7, 21).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은 덮어 주고 가려 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까발리고 창피를 주며 죽음으로 끌고 갑니다. 부모가 덮어줄 때 자녀가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랍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잔인하게 굴지 마십시오.
3. 재기의 기회를 주어라.
실수, 실패는 누구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실패 없이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넘어졌을 때 무너졌을 때 파산했을 때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일어서려는 사람은 격려가 필요합니다. 하고 또 반복해서 해줘야 할 것이 격려이고 축복입니다. ‘괜찮아, 잘 할 수 있어, 맞아, 그렇게 나가면 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아도, 붓고 또 붓다 보면 넘쳐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물이 흐르는 곳에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누가 이 사마리아 여인이 전도자가 되리라고 꿈이나 꿨겠습니까. 딱 한 사람, 딱 한 분 예수님께서 그렇게 접근하셨습니다.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다 아셨습니다.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가 막힌 인생 코치요 멘토입니다. 실로 구세주십니다. 때론 모른척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굳이 다 알아야겠다 하지 마십시오. 숙성되고 익는 발효의 기회를 가집시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기회를 줍시다. 나에게나 다른 모든 사람에게 관대합시다. 한 번에 끝내지 마십시다. 한 번의 판단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지 맙시다. 헛발질도 용납할 수 있어야 많은 골을 넣는 스타가 탄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완성품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미완성도 아름답습니다! 아직 모든 것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다 되지 않았습니다. 목표가 다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부족한 게 많습니다. 마무리되지 않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또 새로운 한 해가 서둘러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떤 극작가는 자기의 무덤에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써넣으라고 하고 죽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마지막도 이렇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라면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바로 주인이신 그분께서 마무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