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는 세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마치시고(1절), 요한의 질문을 받으신 것과(2-19절), 권능을 많이 행하신 곳이 회개하지 않자 탄식하신 것입니다(20-24절). 예수님의 심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건 ‘안타까움’입니다. 흔들리는 요한과 점점 더 사악해져만 가는 사람들과 시달리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이 초청에는 예수님의 마음 세 가지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내가 다 안다
고생하며 시달리는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는 누군가 알아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지금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류 역사가 곧 수고와 무거운 짐에 시달린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대개 짐을 지고 고생하다가 탈진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그 고통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가 누구인지, 어떤 짐을 지고 있는지 다 아시니까 이렇게 부르실 수 있는 겁니다. 다 아시는 주님께서 짐을 진 그대로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다 안다 말씀하시는 주님께 그 짐과 함께 나아가십시오.
둘째, 나와 함께 있자
우리를 아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뭔가 더럭 더럭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과잉행동에 중독된 우리에게는 이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멈춘 시간에 오히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지혜를 붙잡아야겠습니다. 지금 전대미문의 역병 코로나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모든 일상을 바꿔 놓았습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세계를 여행할 수 없고 학교에 갈 수 없으며 심지어 예배조차도 자유롭게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부 지역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시달리고 있습니다. 중압감과 답답함에 사람들이 만사에 예민하고 분노하며 감정의 분출구로 희생양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얘야, 힘들지? 나와 함께 있자.” 이 초청을 받아들여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리와 시간을 만들어야겠습니다. 그 시간은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귀한 쉼을 누리는 때가 될 것입니다.
셋째, 나와 함께 멍에를 메자
모든 사람들의 바람은 짐으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헤어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올무처럼 조여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다 보면 우리 마음이 주님께 흘러갑니다.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흘러옵니다. 나 중심에서 벗어나 주님 중심으로 그 일을 먼저 할 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마6:33),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짐을 질 때, 놀랍게도 우리의 짐이 풀어집니다. 이렇게 주님의 나라를 위해 지는 멍에는 실상 어려운 게 아니고 쉽습니다. 힘센 주님께서 함께 메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메는 멍에의 신비입니다.
*다시 주님과 함께 말씀과 함께!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쉼과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면 잃어버린 안식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쉼과 안식을 주시는 이유 역시 단순 명료합니다. 다시 시작하라고 주시는 겁니다. 이전의 마음이 아니라 아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도전하라고 안식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포기하고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서 열어주신 새 길을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