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3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오늘 말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시는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는 질문이 나옵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2절). 하나님께 어깃장을 놓는 질문을 합니다. 한 마디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적이나 있었던가요?’ 도발하는 말입니다. 이런 질문은 계속 이어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말1:6)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말1:7).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는 잔뜩 ‘토라진 마음’에서 나오는 질문들입니다. 혹시 여기 하나님께 섭섭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심정을 가까운 사이에서는 ‘삐졌다’고 합니다. 역사적 배경을 알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포로지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솔로몬 성전을 재건했습니다(스룹바벨 성전). 곧 이전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라 기대했으나 50여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둘씩 기다림에 지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충분히 낙담할 만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1. 나는 너를 사랑한다(말1:2).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편파적입니다. 일방적으로 편애를 하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에서가 잘못을 하기는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바꿨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야곱 역시 만만찮게 죄를 범했습니다. 특히 거짓말이 수준급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해 불가한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섭섭한 마음에 최고의 약은 이해할 수 없이 넘치게 부어주시는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아십니까!
2. 너의 중심을 살펴라(말1:6).
중심에서 그 사람의 태도가 나옵니다. 신앙 인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묻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종이 주인을 공경하는 것이 상식이고 당연한 일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나를 아버지요 주님이라고 하면서 왜 나를 공경하지도 않고 두려워할 줄도 모르느냐, 탄식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너희는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하고 시치미를 떼느냐고 추궁하십니다. 정말 하나님을 최고로 두려워하며 섬기고 있습니까?
3. 너의 예배를 점검하라(말1:7).
제사의 또 다른 표현이 ‘예배’입니다. 예배의 생명은 예물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물의 생명은 그 예물을 드리는 사람, 예배자에게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 수만 있으면 시원찮은 것을 골라서 제사 예물로 바쳤습니다. 더러운 떡, 눈먼 것, 병든 것, 훔친 것을 드리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악한 짓인지 무감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네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받아주겠느냐”고 일갈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을 갖기 전에 먼저 우리의 예배를 살펴봅시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요일1:8).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섭섭한 마음과 자기감정을 속이면서 살고 있습니다(행5:3). 하나님을 향하여 토라진 마음, 서운한 마음을 깊숙이 눌러놓고 삽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 생활이 어렵습니다. 힘이 듭니다. 괜찮은 것 같다가도 수시로 쓴 물, 흙탕물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상한 마음이 있으면 그것을 감추지 말고 하나님께 토설하십시오. 중심을 아뢰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서서히 진심으로 경험될 것입니다. 마음 중심이 잡히고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