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제3주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바꾼 일주일’이란 주제로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한 주의 행적을 깊이 읽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시간적 배경은 목요일 칠흑같이 어두운 밤입니다. 장소는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는 감람나무 정원입니다. 배신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폭도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마저도 예수님께서 거두라고 하시자 모두 다, 제자들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주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 도움이 절실했던 그 순간에 다 떠났습니다. 덩그러니 홀로 남아 폭도들에게 짓밟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제자들이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회개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1. 자신의 죄를 ‘아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을 비교해 봅시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셨을 때 가룟 유다는 잠잠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막14:27-31). 결과는 어땠습니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 배신했습니다. 다 죄를 지었습니다. 제자들 중 누구 하나 ‘나는 아니오.’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맹인이라고 불렀습니다(요9:49-41). 사물은 보면서도 자신의 영혼은 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은 죄를 알았다는 점에서 제자들 모두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나도 죄를 범할 수 있는 존재다.’ 가룟 유다에게는 이것이 없었습니다. 끔찍한 죄를 저지른 자신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나무에 목을 맸습니다(마27:5 행1:18).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울었습니다(마27:65). 통곡했습니다(눅22:61-62). 자신 안의 ‘어둠과 악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뼈저린 회복의 과정을 밟았습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자신의 죄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요일1:8). 더 나아가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이로 만드는 것입니다(요일1:10).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3. 하나님의 용서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변화와 회복의 성패가 갈리는 곳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왜 그토록 추구하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역설적입니다. 일어나지 않는 변화를 수용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죄와 실패는 어둡습니다(dark). 충성과 회복은 밝습니다(bright). 사람에게는 빛과 어둠이 공존합니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중성을 아시기 때문에 더 애타게 사랑하십니다.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오리지널 아버지의 마음으로 품어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여러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오늘 말씀이 이 스토리의 결론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머리글입니다! 사순절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지었습니까! 끝났습니다. 당신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 거기서 끝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여러분 자신을 수용하십시오. 바로 지금 이 순간 두 팔 벌려 어서 오라고 부르시는 그 품 안으로 들어갑시다. 실패하고 절망한 제자들이 그 안에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교회, 이 제자들의 영적 후손들입니다! 그 죄용서 받은 모임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