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우리는 지금 시편 1권을 깊이 읽어 나가는 중입니다. 매일 정한 분량이 몇 구절밖에 되지 않아 읽는 속도가 매우 느립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하다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게 됩니다. 벌써 시편 1권 읽기 20회가 지나면서 시편 10편에 이르렀습니다. 시편 10편은 작자 미상입니다. 전통적으로 지은이를 다윗으로 봅니다. 다윗이 지은 시편들 사이에 끼어있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작자를 미상으로 두는 데는 시편 10편의 내용이 특정한 개인을 넘어 보편적인 사람들의 경험에 해당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입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통 속에 신음하는 한 남자가 보입니다. 그 사람은 악인들에게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악인들이 멀쩡하고 잘 살고 있다는 점이 더 큰 고통입니다. 악인들은 교만합니다(2, 4절). 욕심과 탐욕이 가득한 채 하나님을 멸시합니다(3절). 형통하고 번성(prosperous)합니다(5절). 저주와 거짓, 포악이 입에 가득합니다(7절). 마치 동굴 속의 사자처럼 음침한 곳에 숨어 있다가 외로운 자와 가련한 자들을 유린합니다(8-9절). 하나님은 본 것도 잊어 버리고 얼굴을 가리며 영원히 보지 않는다고 망발(妄發)을 떠벌립니다(11절). 그 사람은 생각합니다. ‘이런 때야말로 하나님께서 나타나 본때를 보여주어야 할 시간이야!’ 그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은 침묵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 있습니까? 놀라운 건 오히려 이 고통 속에서 이 사람이 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1. 고통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 어떻게 합니까? 갑자기 공격을 받으면 꿩은 몸통은 드러낸 채 머리만 풀숲에 집어넣습니다. 타조도 그런다고 합니다. 우스꽝스러운 건 사람도 매한가지입니다. 있는 고통을 부정합니다.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고통이 줄어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에서 능숙하게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누구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붙들고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은 직면해야 합니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가야 할 방향과 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낱낱이 아뢰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을 자세히 보면, 마치 친구들에 시달리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일러바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느낍니다. 악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혼내달라고 조릅니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15절)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판결을 내려 처리하실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18절). 그의 기도는 전통적인 기도와는 거리가 멉니다. 의례적인 기도문을 읊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의 맛을 내려고 꾸미는 미사여구도 없습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솔직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에 응답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3.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 놓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표현이 아주 감정적입니다. 이건 시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하나님을 적나라한 감정 날것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 주님, 왜 멀찍이 서 있습니까? 왜 이 어려운 시절에 당신을 숨깁니까?’(NIV 번역) 이런 서운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지극히 감정적인 기도는 아무나 쉽게 드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서로 받아줄 만한 든든한 맷집이 있는 허물없는 사이에서만 가능한 기도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그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얼어버렸거나 죽은 감정으로는 시편을 충분히 이해하며 읽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고통의 감정이 정화되면 통찰이 생깁니다. 지금 고통스러운가요? 바로 그때가 하나님을 진짜 뵈올 때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조심스럽지만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삶의 조각을 나눕니다. 어릴 때 무척 감성적이었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며칠씩 함께 지내던 손님이 돌아갈 때면 담장 뒤에 숨어서 울었습니다. 기르던 소를 팔 때도 울고, 심지어 짐승들이 아파도 울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집안 어른들로부터 ‘사내 녀석이 웬 눈물이 그리 많으냐.’고 야단을 맞았습니다. ‘남자가 눈물이 많으면 큰일을 못한다.’ 어느 날 결심했습니다. ‘울지 않으리라. 느끼지 않으리라.’ 그 뒤로 울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느낌(emotion & feeling)을 잃어버렸습니다. 감정이 얼어버렸습니다(iced). 가장 힘든 사람은 아내였습니다. 반응이 없다고 채근하는 아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 인생의 시련과 건강의 위기를 겪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전과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감정을 질서 있게 표현할 수 있게도 되었습니다. 특히 말씀묵상을 하면서 하나님을 감정적으로 더 친밀하게 알아가고 있습니다. 고통의 관찰은 성찰을 줍니다. 성찰이 감정의 터널을 거치면 빛나는 통찰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이 길에 더 동행해보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