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아니오! 지금이 가장 좋습니다. 나이 먹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참 좋습니다. 이전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더 깊이 경험하며 알아가는 것이 으뜸 좋습니다. 부모의 기쁨과 자랑은 자녀들이 잘 사는 것을 보는 겁니다. 그 무엇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주고 또 줘도 더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사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잘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방해하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합니다. 성령님을 원하는 우리가 그분을 거부하고 있다니! 그러므로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방해물을 치워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성령님을 잘 모릅니다.
한 마디로 성령님에 대해서 무지(無知)합니다. 누구신지, 어떤 분인지, 무얼 하시는 분인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성령님에 대해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성령님은 1)진리의 영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알지도 못함이라”(요14:17). 2)예수님을 증언하는 영입니다.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게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15:26) 3)능력의 영입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눅24:49) 하나님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성령님을 바랍니까? 그 모든 게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는 일입니다.
2. 성령님을 무시(無視)합니다.
간절히 사모하지 않습니다. 이미 다른 것으로 배가 부릅니다. 성령님에 대한 무지만큼 영적 성장을 가로 막는 게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마음에 없습니다. 의식하지 않습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령님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세상 바람 부는 대로 사는 걸 훨씬 더 편하게 느낍니다. 이런 사람에게 성령님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을 기대하는 것은 산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님을 안다, 체험했다 하면서도 심드렁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6,13) 반복하고 또 반복하시는 말씀입니다(2:7, 11, 17, 29). 인정하고 초청하고 귀하게 모셔드립시다.
3. 성령님을 자꾸 속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속이고(요일1:8) 다른 사람을 속입니다(딤후3:13). 성령님도 속이려 듭니다(행3:3, 9). 지난 수요일 저녁 찐빵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성령님, 우리 교회에 임하소서.’ 애타게 간구하였습니다. 그 순간 깨우쳤습니다. 첫째, 성령님을 소개하라. 둘째, 사모하라. 셋째, 구하라. 넷째, 회개하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 네가 시달리고 있는 문제, 너를 괴롭히는 죄악을 회개하라. 그 죄로부터 돌아서라. 마지막 다섯째, 악한 원수 마귀 귀신들을 대적하라. 쫓아내라. 추방하라. 그 깨달음이 오늘 말씀을 전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불순종하는 죄악을 떨치고 일어나 속히 돌이킵시다. 마귀를 대적하고 작은 것 하나부터 성령님께 순종합시다.
*돌이켜서 오순절 성령충만을 간구합시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 창립, 설립 장면입니다. 장소는 마가 다락방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입니다.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인다고 해서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야 교회가 세워집니다. 건물, 시설, 사람, 모임이 있어도 교회가 되는 게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야, 나타나셔야, 일을 하셔야 교회가 됩니다. 우리도 그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처럼 오순절 성령강림을 바라며 기도합시다. 집에서도 기도하고 일터에서도 예배당에 나와서도 성령님의 왕림을 간구합시다. 낮이나 밤이나 기도합시다. 특히 매일 새벽을 깨웁시다. 아멘, 아멘, 아멘.